from people 2006/09/15 23:05
작년에도 그랬지만 가을에는 어쩐지 (톨킨의) 엘프가 땡겨...

특히 이 남자(<-)가 그리워진다. 누가 뭐래도 내가 가장 사랑한 캐릭터는 역시 이 남자, 글로르핀델인걸.

두 탑 개봉하고 갑자기문득불현듯 반지 슬래쉬에 투신해서 반년만에 실마릴리온으로 궤도수정한 뒤 3년여를 심하게 버닝한 나머지 제대로 된 삽화 한장 없는 엘프가 꿈에도 나오고; 없는 솜씨로 그려도 보고, 글로 써도 보고.
(물론 이 왼편의 아릿다운 글로르핀델은 제가 그린 게 아니라 아오아라시님이 축전으로 그려주신 겁니다>,<;; 초마이너 글로르핀델 국내 웹링을 열었었죠. 지금은 폐쇄)

스몰빌 렉스가 슬래쉬를 읽게 만든 유일한 캐릭터였다면 글로리는 슬래쉬를 쓰게 만든 유일한 캐릭터였다. 내가 줄 수 있는 모든 좋은 부분을 다 줬던 남자. 혹은 내 취향의 집대성이랄 수도 있고.

축복받은 땅에서 태어나 젊은 나이에 미들어스로 건너오고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용감히 싸우다 죽어버린 엘프. 최후에 발록을 죽였다는 것만 빼면 여기까지는 상고시대의 놀도르 일반 엘프와 하등 다를 것 없는 삶인데, 이 남자는 죽었으니 쉬어도 될 걸 웬일인지 다시 살아나서 자기가 죽은 땅을 또 찾아와 또 고만고만한 옛날 주군의 손자의 아들-_-을 보좌하면서 리븐델 같은 작은 은신처에서 하릴없이 살아간다. 뭔가 기구하잖아. 빛의 시대에 태어나 역동하는 역사 속에서 나름 화려한 죽음을 맞은 남자가 되살아난 뒤 자기 세대에서 이룬 영광이 천천히 사라져가는 걸 지켜보고 있다는 게 포인트랄까.

내 설정상으로는 상쾌발랄명랑 잘 웃고 잘 울고 남에게 져줄 줄도 아는 귀여운 총각이었던 글로르핀델이, 그가 헌신했던 곤돌린 왕국과 극적인 최후를 함께한 뒤 되살아나 돌아왔을 때 미묘하게 그늘이 있는 남자가 되는 게 좋았다. 이 남자가 그냥 평범하게 살던 애도 아니고말야 엑셀리온과 함께 [곤돌린의 쌍벽]으로 불리던 거의 원수급 귀족에다; 방계 왕족이라는 설도 꽤 설득력 있고; 간달프도 죽네사네 하면서 때려잡은 발록도 한 마리 죽인 발록 슬레이어(문제는 자기도 같이 죽었다는 거~;;)라서 곤돌린 유민들이 얘를 기리는 노래까지 만들어 불렀는데 갑자기 얘가 짠 하고 미들어스로 돌아와버리면 서로간에 얼마나 이상야릇어색한 상황이겠어. 더 낯부끄러운 건 이 글로르핀델의 무덤 위에 그의 머리칼색과 같은 (애가 어찌나 금발인지 글로르핀델이라는 이름 자체가 금발Glorfindel이라는 뜻; 더 재밌는 건 가문 이름이 황금꽃Gloden flower 가문이라 일명 금화공金花公이라는 거~;;;) 금빛 꽃이 피어나 곤돌린 유민들이 이 꽃을 글로르핀델이라고 불렀다는 거지;;

물론 1시대 끄트머리에 곤돌린이 붙어있던 벨레리안드 땅이 지각대변동(이라고 쓰고 발라들의 뒷북이라고 읽는다)으로 가라앉아버려서 글로르핀델이 자기 무덤과 대면하는 사태는 일어나지 않았지만 말이다, 자기를 기리는 노래에 꽃까지 있는 상황에서 자기가 죽었다는 걸 두번 세번 되새겨야 하는 남자라니 팔자 참 사납지 않은가. 게다가 뭔가 임무가 있어서 돌아왔다는데 그 임무라는 게 아무리 봐도 "미들어스 구석탱이 은신처 리븐델에서 엘론드 뒤치다꺼리하며 한 몇천년 기다리다가 시간맞춰 나즈굴에게 쫓기는 프로도 (백마 태워) 픽업해오기"란 말이다.; 그거 하나 하자고 몇천년간 시간 죽이고 있는 셈인데 죽은 담에 서쪽 가서 조용히 쉬는 게 축복인 엘프로서 이 남자 인생이 심하게 불쌍해지는 것이다.-_-;;;

하여간 '내' 글로르핀델은 마냥 착하고 귀엽고 쾌활발랄하던 소년으로 출발해서 미지의 땅, 선조들의 고향이라는 미들어스를 아련히 동경하다가, 동료와 친족을 희생해가며 미들어스로 건너오는 과정에서 천천히 성장해가는 캐릭터였다. 미들어스에서 또 생고생해가며 나라 하나 세우고, 몇백년쯤 평화롭고 아름다운 청춘을 구가하며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연애도 하고. ...그러니까 내 글로리의 영원한 파트너는 엑셀리온이었다. 샤프하고 냉정한 엑셀리온과 유연하고 농담 좋아하는 글로르핀델, 사이좋은 친구에서 연인으로 발전하는 커플이 워낙 취향인데다 풋풋한 청년무관들의 퓨어한 연애가 정말 취향직격이라... 그러다 곤돌린 최후의 날에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희생하는 거지. 이 싸움에서 자기도 죽고 엑셀리온도 죽을 걸 알면서, 적을 분산시키기 위해 각기 다른 곳에서 죽기로 결정하는 그 순간이야말로 만년소년이던 글로르핀델이 어른이 되는 순간이다. 그런데 그렇게 죽고 나서도 한편으로는 그게 정말로 옳은 결정이었는지 후회가 남는 거야. 뭐 그런 게 인생 아니겠어. ...엘프지만.
어쨌든 남좌;;가 되어 돌아온 글로르핀델은 여기저기 방황하면서 이런저런 일들을 겪고. 서쪽에서 오매불망 기다리고 있는 엑셀리온 두고서 딴 엘프랑 또 연애하고.;; 내 글로리는 꽤 순정파긴 해도 천년만년 과부살이 할 타입이 아니라서 이놈저놈그놈 하고 다 엮어보는 게 내 목표였지 아마...-_-;

금발에 백마 타고 다니는 왕자 이미지가 딱 글로리인데, 잘 웃고 잘 울고 천성적으로 솔직하고 쾌활하고 오지랍 넓고 다정하고 농담 좋아하고, 한편으로 나이가 들어버린 다음에도 젊은이처럼 굴고 아무하고나 쉽게 친해지지만 늙은이답게 실제로 무슨 생각인지 알기 어렵고. 상당히 성격좋은 남자지만 동시에 기벽이 있고 제멋대로고. 어떤 상황에서도 파괴적이지 않다는 게 괴팍함에도 소외되지 않는 비법. 주변을 전염시키지 않는 그늘을 감추고 있는데, 그건 갈라드리엘이나 엑셀리온처럼, 한 시대를 같이 지내본 적이 있는 사람들만 이해할 수 있는 그런 것. 그래서 내 글로리는 쉴 곳이 필요하면 갈라드리엘에게 가고, 이런저런 연애를 하다가도 결국에는 차여서(안 차이는 듯해도 항상 차이는 게 또 이 남자의 포인트) 엑셀리온에게 가는 거지.;

아직까지 글로리 글로리 할 수밖에 없는 건 이 남자만큼 캐릭터를 잡아본 적이 없어서일지도 모르겠다. 이만큼 이해해본 캐릭터도 없겠지. 3년간 들고팠던 캐릭터가 달리 없었으니까;; 어쨌든 가을되면 유난히 글로리가 그립다. 가을남자 글로리.
2006/09/15 23:05 2006/09/15 2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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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Subject: 글로르핀델과 켈레보른

    Tracked from WAY TOO WEIRD 2006/09/17 02:44  delete

    반지의 제왕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레골라스를 예뻐하고 있을 때, 쇤네가 제일 '멋있어'했던 요정이 바로 임라드리스의 글로르핀델과 로스로리엔의 켈레보른이었습니다. 글로르핀델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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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AMAGIN 2006/09/16 21:54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엘프가 땡기는 시즌이 있죠. 저도 얼마 전에 왔었는데(...무려 투르곤 시즌이었습니다. 움하하하.;;;;;;)간만에 보는 글로리네요.^^두라단님의 글로리는 어쩐지 제가 생각하는 그와도 닮은 곳이 많은 것 같아요. '안 차이는 듯해도 항상 차인다'에서 한번 웃어주고..ㅜㅜ)b 전 이 사람이 언제나 재미있는, 근데 결국은 노친네인 남자라서 좋아합니다.^^ 엘프 얼굴이야 세월이 무색하겠지만-살아온 궤적 탓에 더 감잡기 어려운, 그런 거요.

    에구. 간만에 반가움에 난입해버렸습니다;;; 아하하하;;;

    • 두라단 2006/09/18 01:38  address  modify / delete

      으하하하 그렇죠. 톨킨 엘프는 잊어버리고 있다가도 시즌이 돌아와서 번번히 슬퍼지고 되새겨지고 그렇더군요. 잊혀지지 않는 전설, 톨킨의 힘이겠죠.

      전 글로리가 너무나 잘나고 멋지고 훌륭한 남자인데 맨날 차이는 '제2의 남자';따위로 취급되는 게 너무 싫어서 슬래쉬를 쓰게 된 건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픽션을 보면서 항상 종국에는 차이는 글로리가 연상이 되는게-_-;;; 어째서 작업-실연-낙담-재기-작업으로 무한궤도를 밟는 이미지인 겁니까 이 남자. 글로리를 차지 않는 남자는 오로지 엑셀리온밖에 없을 것 같고.;; 그래서 제가 엑시글로를 좋아한단;;

  2. PPANG 2006/09/17 02:16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아앍 아앍 렉스말고 또 두라단님이랑 같은 취향을 만나 버리다니! 글롤피, 글롤피!!! ...누구 맘대로 글롤피라 부르냐고 냅다 때리시면 할 말 없지만, 금발의 글롤피 몹시 사랑합니다요;ㅁ; 쇤네의 상상 속에선 가운데땅에서 쇠락해 가는 요정들의 이미지처럼 강하고 어딘가 슬퍼 보이는 그런 군주. 열심히 마우스로 글롤피 그려서 혼자 보고 즐기고 막 그랬다지요. 저 그림의 글롤피는 심하게 아름답습니다;ㅁ;

    • 두라단 2006/09/18 02:03  address  modify / delete

      아앗 빵사마도 글로르핀델 좋아하시다니! 역시 빵사마랑 나는 인연인가봐.(갖다붙이긴)
      글롤피, 으하하, 여기저기 라이브저널에서도 그렇게 부르던걸요. Glorfy. 저한테는 원체 글로리어스한 로드님이시라 글로리. 강하고 아름답고 슬픈 엘프 로드에게 이런 별명 붙이고 막 웃어도 되는 거...지요 뭐 안될 게 있겠어요 흥. 다 애정인걸.
      전 빵사마랄 비교도 안되는 실력으로 에이뽀 용지에 끄적끄적 그려가며 혼자 기뻐하고 그랬어요. 흐흐. 글로르핀델 말馬 도 좋지 않나요! 백마 아스팔로스. 백마에 금발에 공주님 구하기까지, 글로르핀델은 정말 왕자님 같단 말이죠.-///-